오다솔, 기억의 편린들의 몽타주 

전혜정 / 미술비평, 예술학 박사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감각은 이미 기억이다.”

우리가 알고, 느끼고, 깨닫고, 표현하는 모든 것은 어쩌면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표현한대로 이미 기억일 수 있다. 기억을 과거라는 시간 속, 어떤 공간에서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떠올린다는 구체적이고 한정적인 의미에서 벗어난다면, 이미 우리가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회상의 단계를 거치건 거치지 않건 우리가 태어난 이 후 –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 우리에게 조금씩 쌓여간 흔적이 드러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어떤 예술가도 완전한 무(無)에서 작품을 창조할 수 없다. 모든 예술 작품은 이전에 대한 기억과 관계되는 것이다. 기억의 여신인 므네모시네(Mnēlmosynē)와 제우스는 아홉 밤 몸을 섞어 아홉 명의 뮤즈들을 낳았고, 이들은 각각 시와 음악, 춤 등 예술을 관장한다. 예술은 기억의 딸들인 것이다. 오다솔은 화면에 기억을 쌓는다. 속성과 본질을 뽑아 추출해내는 추상(抽象, Abstraction)이란 용어처럼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르게 화면에 쌓여가는 형태와 색채를 작가는 ‘기억’이라 부른다.

사실 기억이란 많은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주제이자 도구이기도 하다. 예술의 전 영역에 걸쳐 창작되는 모든 작품들은 기억과 회상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그 기억과 회상의 빈 결여를 채우려는 감각적 형상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뮤즈들은 완벽한 충만의 숫자인 열이 아니라 하나가 결여된 아홉이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누구나 잊는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해 저장한다면, 인간은 새로운 경험의 가능성을 열지 못할 수도 있다. 비슷한 사건이라도 기억과 망각을 반복하면서 그 차이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경험의 가능성, 즉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망각하기 때문에 다양하고 새로운 기억들을 경험할 수 있으며, 인간의 경험에 있어 기억을 변경시키는 상상이 개입하기에 거기에서 새로운 창조성이 배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오다솔은 기억을 공간과 결부시킨다. 보통 기억은 과거의 시간과 관계된다. 끝없이 이어진 수평의 시간 속 하나의 수직선을 그어 그 교차점 위에 기억들을 쌓는다. 공간은 시간 속 기억이 일어난 정박지(碇泊地)로서의 장소이다. “사실 공간은 시간보다 더 길들여진 듯, 혹은 덜 위험한 듯 보이기도 한다.”(Georges Perec) 그러나 작가가 한 때 디자이너로 일했다는 크루즈처럼, 정박된 공간은 머물러있지 않고 부표처럼 불안하게 떠다닌다. 기억은 언제나 실제를 과장하기고 하고 축소하기도 하며, 덧붙이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기억은 논픽션 다큐멘터리인줄 알았으나 사실에 기반을 둔 영화나 소설 같은 것이다. 기억은 항상 과거에 대한 불확실한 상상력의 리얼리티인 것이다. 어떤 기억도 실제 그 자체 그대로 기억되지 않고, 왜곡이나 망각을 겪을 수밖에 없다. 즉 상상력과의 연관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오다솔은 몽타주(montage) 기법으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공간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는 주로 건축의 부분 이미지를 해체하고 재배치하여 기억의 퇴색 과정을 담고 있다. 보통의 몽타주 – 특히 포토몽타주는 완결된 사진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재조립하고 완성하나 오다솔의 작품들은 완결이 아닌 재조립의 과정에서 해체되어 오픈되어 있다. 무방비 상태인 그 틈으로 기억이 새어나오고 기억의 편린(片鱗)들이 뒤엉켜있다.

“기억은 고정된 장면으로 재생할 수 없다”는 작가는 사람의 정체성이 기억으로부터 온다고 하나, 정작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의구심에서 이를 재구성하며 작업을 이어간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정말 내가 경험한 것을 기억하는 것인지, 아니면 부모님이나 어른들로부터 들었거나 사진과 편지로부터 본 것을 내 기억으로 착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경우가 있다. “기억을 사랑하면 할수록, 기억은 점점 더 강해진다.”(Vladimir Nabokov) 우리는 좋은 기억을 사랑하여 추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 기억이 정확하건 정확하지 않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조각난 공간 속에 색색이 피어난 기억의 재구성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억을 살아있게 한다는 것이다. 오다솔의 몽타주는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지는 건물들과 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몽타주는 분명한 형상들이 드러나고 끊긴 이미지들이 연결되어 낯선 느낌들을 살아있게 하나, 오다솔의 몽타주는 기본적으로 건축이미지에서 연유한 것이기에 연결과 단절이 연속적으로 추상화되어 어떤 것들은 알아볼 수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알아볼 수 없이 막연하고 모호한 이미지만 가득하다.

기억은 한 가지 본질적인 점에서 상상과 다른데, 기억에는 언제나 시간 의식이 수반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내가 그것을 과거에 경험했다는 의식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과 상상이 서로 뒤얽힌 상태가 예술의 토양일 것이다. 이 토양은 단단히 발밑에서 우리를 받쳐주고 있지는 않다. 오다솔에게 기억은 망각 작용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퇴색, 훼손 되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연약”하다. 섬세하게 층을 이루는 면들, 그리고 그 면을 채우고 있는 색들은 분명하다기 보다는 아련하다. 기억은 고정되어있거나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아니다. 우리는 기억이 정말 일어난 일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꿈 혹은 상상력의 잔존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발을 디디고 있으나 언제든 푹 꺼질 수 있는 지층 같은 것,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바로 기억인 것이다.

작품 속 선과 면은 기억의 장면들이 추상에 가까워진 상태를 드러낸다. 오다솔이 수집한 여러 레퍼런스들은 건축이미지에서 출발한 듯 드로잉에 가깝다. 건축이미지는 익숙하지만 낯선, 우리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선과 면은 켜켜이 쌓이고, 공간들은 색으로 입혀진다. 선과 면, 색은 조형요소를 뽑아내어진 추상일 뿐 아니라 망각 속에서 건져낸 기억이기도 하다. 하나의 건축물을 짓듯이 일종의 설계도라 할 수 있는 것을 디지털로 작업한 후 이를 다시 해체하고 재배치하여 캔버스에 회화적으로 옮길 때 우리의 기억이 온전히 보존되지 않듯, 디지털로 구성된 작품의 설계도 즉흥적인 변화를 겪는다. 물감이 흘러내리거나 붓터치가 더해지며 색면들은 추상의 평평함에서 다시 공간의 깊이감을 부여받는다.

공간들은 부서지기 쉽다. 시간이 마모시킨 공간의 조각을 어떤 기억도 다시 붙이지는 못한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연약하고 덧없는 기억의 조각들을 붙드느니 망각이 지배하게 두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의 형태가 어떠하건, 그 색이 어떠하건, 우리에게 그것이 되돌릴 수 없는 부서진 조각과 같은 것이라도 쌓여진 그 조각들에게서 배어나오는 그 빛들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아니 망각할 것이다. 이차원의 화면에 중첩되어진 기억과 망각의 몽타주들. 오다솔의 기억들이 화면 속 공간에서 생명력을 부여받아 실제 나의 공간 속에서 숨 쉬었으면 한다. 삼차원의 공간에, 작가가 경험했던 건축의 공간에, 온 세계를 다녔던 배의 공간에 다시 되살아나길 원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딸들이 더 춤추길 원한다. 연약한 지층 위 바닥은 흔들리나 부유하듯 더 가볍고 더 약하게, 그러나 더 오래 우리의 기억과 계속 함께 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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